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 안드레이 사하로프

핵무기를 만들고 핵무기 때문에 고뇌하는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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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 안드레이 사하로프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 안드레이 사하로프

1980년 1월 22일, 노벨 평화상(1975년도) 수상자이며 소년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모스크바 시내의 아파트를 나와 ‘볼가’세단차에 몸을 실었다. 지난 10년동안 매 화요일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는 길이었다. 차가 레닌스키 프로스펙스지구로 들어와서 19세기식 아카데미 건물쪽으로 접근하고 있을때 경찰 차가 가로막았다.

모든 명예 빼앗긴채 추방

이들은 사하로프를 곧장 모스크바 검찰청으로 호송했다. 검찰차장 ‘알렉산더 레쿤토프’는 사하로프에게 소련수상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명령을 읽어 내려 갔다. 그 내용은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인 사하로프에게 지난 날 주었던 일체의 명예를 박탈한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소련 최고의 민간훈장인 3개의 사회주의노동영웅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하로프는 브레즈네프의 이 서명이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인쇄된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검찰관은 그동안 저지른 ‘사하로프’의 ‘파괴적인행동’때문에 ‘고르키’시로 추방한다고 선언했다. 사하로프는 전화로 ‘예레나’부인을 불러 이런 사실을 알리고 떠날 채비를 하라고 했다.

그날 저녁 어둠이 깔린 모스크바공항에서 사하로프내외는 경찰의 감시아래 TU-134 터보제트 여객기를 타고 모스크바 동쪽 2백60마일 지점에 있는 불가강의 군사, 공업도시 고르키로 떠났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사하로프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이 폐쇄 도시에서 ‘국내 추방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국내추방이 알려지자 서방세계는 맹렬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백악관은 소련의 조치가 “인권을 존중하는 모든 인류의 열망에 대한 타격”이라고 말했고 이탈리아 대통령 ‘알렉산드로 페르티니’는 브레즈네프에게 항의전보를 보냈다. 서독정부는 사하로프의 모스크바 귀환을 요구했으며 프랑스국회 의장 자크-델마스는 사하로프 추방에 분개하여 소련공식방문의 여정을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갔다. 심지어 이탈리아등 서구의 공산당 기관지들도 소련의 조치를 비난하고 나섰다.

소련사회에서 과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사하로프가 무슨 이유로 소련 당국의 이런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었을까? 사하로프는 그동안 1979년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핵전쟁을 언제나 걱정하던 이 물리학자는 유엔과 소련정부에 대해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련군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사하로프는 이 무렵 외국기자들에게 발표한 성명에서 “사태는 너무나 비극적이고 위험하기 때문에 이 핵시대에 사는 인류에게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연쇄반응을 막는 방법에 우리 모두가 전념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할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자 사하로프는 다시 모든 국가들에게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라고 촉구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프가니스탄 침략 이후 줄곧 서방 국가들로부터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소련정부는 이것을 구실로 사하로프의 입을 막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26세에 박사학위

오늘날 ‘러시아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사하로프는 어떤 인물일까? 192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 난 그는 26세에 박사 학위를 받고 1940년대 후반에는 핵융합반응 연구 그룹에 참여하여 최초의 수소폭탄을 만드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약관 32세에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아카데미 창립이래 정회원으로 선출된 가장 젊은 과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1957년까지만 해도 사하로프는 한사람의 과학자로서 그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미·소라는 두 초강대국이 모두 수소폭탄을 보유한다면 어느 한나라가 갖는 것보다 세계는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소폭탄 개발에 그가 참여한 행위는 정당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에 관해서는 훤한 사하로프는 그 뒤 계속되는 핵무기실험에서 나오는 방사성 낙진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세월이 갈 수록 수소폭탄 개발자로서 그는 일종의 죄책감이나 또는 적어도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8년 그는 흐루시초프에게 소련이 계획하고 있는 일련의 핵실험을 중단하라는 특별탄원서를 보냈으나 이 탄원은 툇자를 맞았다. 이때부터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회의에서 핵실험 반대 발언을했고 소련정부 고위층에 편지와 각서를 보냈다. 1961년에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핵실험을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직접한 오찬회에 참석한 흐루시초프에게 건네 주었다. 사하로프는 이 편지에서 당시 논의 되고 있던 미·소간의 3년간 핵무기 실험중지협약이 끝난 뒤에도 핵실험을 재개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글을 본 흐루시초프의 반응은 “사하로프는 훌륭한 과학자다. 그러나 외교정책을 만드는 일은 이런 미묘한 일을 다루는데 전문가들인 우리에게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1963년 핵금지조약을 맺은 뒤에도 소련 정부에 대한 사하로프의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당시 생물학에서 큰 잘못을 저지른 ‘뤼셍코’학설을 극복하려는 소련과학자들과 힘을 모아 뤼셍코의 가까운 동료가 소련과학 아카데미회원 후보로 천거되는 것을 저지했다. 그래서 이 후보를 개인적으로 두둔했던 흐루시초프를 노발대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학문제를 중심으로 하던 사하로프의 비판활동은 1966년부터 그 영역을 넓혀갔다. 이 해에 그는 24명의 저명한 소련 지식인들과 함께 스탈린의 복권을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다. 1968년 에는 ‘진보·공존 그리고 지적인 자유’라는 에세이집을 내놓으면서 군비경쟁의 종식, 개발 도상국가들을 위한 국제적인 경제·기술협력, 환경에 대한 더 큰 관심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조직간의 친선을 호소했다. 이 책은 서방세계에서 널리 읽혔으나 사하로프는 이 책의 출판결과 신원의 보증과 직업을 잃었다. 그는 모든 비밀연구에서 제외되었고 직위는 강등되고 봉급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감봉되었으나 아카데미 회원자격만은 박탈되지 않았다.

사회문제에 관심

사하로프는 사회와 정치문제에 더욱 깊이 관여하기 시작하여 1970년에는 모스크바 인권위원회를 창설하고 이스라엘로 이민하려는 소련 유태인들을 비롯한 반체제 집단을 돕기위한 할동을 전개했다. 사하로프가 1970년을 기해 본격적인 인권운동과 반체제 운동에 나선 배경을 현재 부인인 ‘예레나 본너’여사와의 결합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70년 사하로프와 만나 그뒤 결혼한 본너여사는 결혼전부터 매우 활발한 반체제운동가였다. 그녀의 양친은 한때 열렬한 볼셰비키였으나 아버지는 1937년의 피비린내나는 스탈린의 숙청에서 처형되었고 어머니는 17년간 감옥과 노동수용소와 국내유배 생활을 보냈다. 소아과의사였던 ‘본너’여사는 공산당을 제발로 걸어나와 반체제운동의 투사로 나섰다. 고집이 세고 적극적이며 적에게는 비수같이 날카로운 공격을 퍼붇는 본너여사는 고상한 원칙과 조심스런 사고방식의 온화했던 사하로프를보다 투쟁적인 스타일의 인물로 전환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사하로프는 소련내 인권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75년 노벨 평화상을 받게된다. 노벨상장은 “사하로프의 진실에 대한 사랑, 인간의 불가침성에 대한 강력한 신념, 폭력과 야음성에 대한 투쟁, 인간정신의 용감한 옹호, 사심없고 강력한 인도주의적인 신념은 그를 오늘날 세계가 그렇게도 갈망하는 인류양심의 대변자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사하로프의 가장 큰 관심은 핵전쟁을 피하는 문제이었다. 사하로프는 핵전쟁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핵전쟁은 ‘클라우제비츠’식의 이른바 다른 방법에 의한 정치 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도시, 산업, 수송, 교육 시스템의 완전한 파괴와 방사능에 의한 들과 물과 공기의 유독화, 인류의 태반의 실질적인 파괴, 빈곤, 야만, 무지로의 복귀, 방사능의 영향으로 생존자의 유전적인 퇴화, 문명의 물질적·정신적인 바탕의 파괴 등 세계의 두 초강대국의 불화가 빚어 낼 이런 위험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성을 가진 생물이라면 누구든지 이 비극의 벼랑에서 우선 피하려고 노력한 다음 다른 필요를 만족시킬 생각을 한다. 인류가 이 벼랑에서 벗어 나려면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

초기의 그의 글은 소련지도층을 겨냥한 것이었으나 차츰 소련밖의 지도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의 글을 모은 3권의 책이 ‘사하로프는 말한다’(1974)‘나의 나라와 세계’(1975), ‘경고와 희망’(1978)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미국에서 출판된데 이어 1980년에는 뉴욕 타임즈 매가진이 ‘유형자(流刑者)의 편지’라는 타이틀로 발표했다.

한편 본너여사는 사하로프가 유배된 후에도 계속 소련체제에 대한 격렬한 비판운동을 전개하다가 1984년 마침내 남편이 있는 고르키시에 5년간 유배형을 받았다. 그런데 사하로프부부는 둘다 건강이 좋지 않다. 사하로프는 심장병을 앓고 본너여사도 심장병과 녹내장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내외는 신체적인 약점을 오히려 방패로 소련체제에 대한 투쟁을 벌였다. 지난해 사하로프는 본너여사가 서방에 나가 치료를 받게 출국허가를 해 달라고 6개월간의 단식투쟁으로 들어갔다. 사하로프 건강이 매우 걱정스러울 정도로 악화되자 소련 당국은 그의 몸을 꽁꽁 묶고 코를 막은 뒤 입으로 숨을 쉬는 틈을 타서 억지로 음식을 집어 넣기도 했다. 그런데 때마침 지난 해 11월에 열린 미·소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소련당국은 서방측과의 기술무역을 늘리는 댓가로서 인권문제를 개선한다는 제스쳐를 보이기 위해 본너여사에게 출국허가를 내렸다. 작년 12월 로마에서 눈 치료를 한 본너여사는 전 남편의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 가서 치료를 마친 뒤 지난 6월 남편이 있는 고르키시로 되돌아 왔다. 본너여사는 남편이 없었다면 다시는 돌아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실토하면서도 살아 있는 한 인권운동을 계속할것을 다짐하고 있다.

죽이지않고 병들게한다.

사하로프내외에 대한 소련당국의 박해는 날이 갈 수록 교활해 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미국과 서독에서 동시에 출간된 ‘고독을 함께하며’라는 저서에서 본너여사는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가 사하로프에게 “당신을 죽이지 않고 병들게만들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폭로하고 “아무리 강인한 의지를 가진 인간도 이같은 좌절과 박해를 받게 되면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현재 온 몸이 떨리는 병으로 시달리고 있는 사하로프는 자살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사하로프의 인권운동과 고르키시의 유배생활을 자세히 서술한 이 자서전은 집필과정에서도 여러차례의 수난을 겪었다. 한번 KGB가 사하로프가 타고있던 승용차를 습격하여 종류를 알 수 없는 화학품으로 그를 마취시킨 뒤 원고의 일부를 탈취해 간 일도 있다.

그런데 사하로프는 과학정신과 인간의 자유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냉정한 관찰과 경험적인 타당성과 공개적인 정보의 교환등 과학적인 훈련에서 얻은 습성을 가지고 정치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또 많은 과학자들이 소련내의 더 많은 사회적, 정치적,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에서 앞장서고 있고 외국의 과학자들이 이들 소련 과학자들의 어려운 입장에 강력하게 호응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하로프는 또 과학과 정치의 결합을 주장하고 있었다.

1968년 그는 정치, 경제, 예술, 교육 그리고 군사문제를 이끌어나가는 과학적인 방법의 실현을 주장했다. 그는 소련정부의 비합리성과 부정은 모두 과학적인 방법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있다. 고대그리이스의 철학가들처럼 그는 실제와 규범적인 원칙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일치되어야하며 진실성과 정의는 하나라고믿고 있다. 저명한 소련과학문제 전문가인 미국 매서추세츠공대 교수 ‘로렌 그래험’은 오늘날 서방세계의 지식인들이 사하로프에게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서방의 과학자들도 한때는 사하로프와 같은 꿈을 가졌으며 그 뒤 이런 꿈은 차츰차츰 포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꿈의 실현에 대해서 미련을 갖는데서 나온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꿈이란 결코 과학적인 원칙에 바탕을 둔 합리적으로 운영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신념이다.

양심있는 과학자의 수난

‘사하로프는 말한다’라는 저서에서 그는 과학적인 방법에 관해 다음과같이 말했다.

“저자의 견해는 내외정책의 원칙과 특정한 측면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관해 많은 걱정을 표명하고 있는 과학기술 지식인들 가운데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걱정은 정책, 경제, 예술, 교육 및 군사문제를 이끌어 나가는 과학적인 방법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고조되었다. 우리는 ‘과학적’이라는 것은 편견이 없다는 전제와 공개토의와 결론을 두려워 하지 않는 가운데 사실과 이론과 견해를 깊숙히 분석하는데 바탕을 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러시아와 소련의 과학기술사를 훑어 보면 과학자들의 수난의 역사로 얼룩져 있다. 러시아 최초의 대과학자였던 ‘미하일 로모노포프’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관리자들의 독재적인 방법에 완강히 반대하다 8개월간 가택연금을 당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저명한 러시아 과학자들중에 크건 작건 정치적인 어려움에 부딪치지 않고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한사람이며 화학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프’는 그의 민주적인 정치적 견해에 대한 일부의반감 때문에 평생 과학아카데미의 정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권력을 굳히면서 소련의 과학기술자들을 사회 상류층의 일부라고 보고 계급투쟁이라는 구실로 수천명의 정상급 과학자들을 수용소로 보냈다. 소련에서 가장 우수한 일부 물리학자 들은 ‘이상주의자’나 또는 ‘적의 아이디어밀수입자’라는 낙인이 찍혀 투옥되었는데 그중에는 뒷날 노벨상을 받은 ‘레프 란다우’를 비롯하여 소련 비행기설계의 ‘아버지’인 튜포레트 그리고 훗날 소련우주계획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로료프’도 있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노동수용소에서 병사 하거나 처형되었다.

소련에서는 과학자가 일단 과학자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정부와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표명할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추방과 투옥 뿐이라고 그래험교수는 말하고 있다.

소련당국은 그들의 수소폭탄의 아버지인 사하로프가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했기 때문에 “국가기밀을 보유하고 있어 소련을 떠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런 해묵은 비밀의 누설보다도 그의 자유로운 인권운동이 미칠 영향을 더 두려워 하고 있는 것 같다.

글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과학동아 1986년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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