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래서 이과가 일해봤습니다] 인간세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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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세종대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등을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젠 아닙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은 바로 ‘집에 오자마자 씻는 사람’입니다. 알람 울리자마자 일어나는 사람, 밥 먹자마자 설거지하는 사람도 존경합니다. 위의 세 가지를 모두 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존경을 넘어 무섭기까지 합니다. 휴먼, 맞습니까

 

원래 사람이란 집에 오면 일단 누워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 씻어야 하는데’란 생각을 한 시간 반쯤은 해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씻으러 갈 수 있습니다. 막상 씻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도 안 되죠. 미적거리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꿈속에서도 씻어야 한다며 중얼거린 경험, 기자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집에 오자마자 가방 정리하고 세수하는 사람들은 뭘 해도 될 사람들이다”란 말이 트위터에서 인기를 끈 적이 있었죠. 무척 맞는 말이고, 전 안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이과, 다른 건 몰라도 인간 세탁기는 꼭 좀 개발해 주자”란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인간 세탁기, 쉽죠. 성인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세탁기를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1단 계산해봤습니다

세탁기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약속^^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는 대신 세탁기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봅시다. (이때 세탁기는 통돌이 세탁기고, 성인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세탁통의 반지름은 1m가 되게 개조했다고 가정합니다.) 세탁과 헹굼 과정은 세탁물, 그러니까 사람을 물속에 넣고 잘 흔들어가며 세제와 섞는 과정입니다. 조금 어지럽긴 하겠지만 잘 참을 수 있어요. 문제는 탈수입니다. 세탁기 기종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탈수 과정에서 세탁통은 1분당 1000~1600회 정도 회전하거든요.

 

1분당 1000~1600회 회전이라니, 감이 잘 안 오네요. 이때 느껴지는 가속도의 크기를 한번 계산해봐야겠습니다. 세탁통이 회전하는 운동은 구심력 공식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구심력이란, 물체가 원운동을 할 때, 원 중심 방향으로 물체를 당기는 힘입니다. 세탁통이 분당 약 1500회 회전한다고 합시다. 이때 세탁통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원운동 하는 속도는 초속 약 157m입니다. 이걸 제곱한 다음 반지름인 1m로 나누면 세탁통 속 사람이 느끼는 가속도는 약 2만 4649m/s2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구의 중력가속도는 약 9.8m/s2이니 평상시 느끼던 지구 중력보다 약 2515배 큰 힘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참고로 전투기 조종사들은 지구 중력의 9배에서 15초 이상을 견뎌야 전투기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은 지구 중력의 7배만 돼도 의식을 잃죠. 아무리 귀찮아도 목숨은 소중합니다. 일반 세탁기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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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 발명된 제품이 있습니다 

쓸데없어 보이지만 사실 쓸 데 많은

 

사실 사람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인간 세탁기’는 이미 많이 개발돼 있습니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에서 일본 가전기업 산요가 공개한 ‘초음파 목욕장치(Ultrasonic Bath)’가 그 예입니다. 사다리를 타고 우주선 모양의 작은 장치 속으로 들어가면 내부로 연결된 노즐을 통해 따뜻한 물줄기가 나와 몸을 적셔줍니다. 그다음 따뜻한 물이 차올라 본격적인 목욕을 시작합니다. 강한 물줄기가 나와 몸을 마사지해 주고, 초음파 생성기가 작은 공기 방울을 만들어 피부에 묻은 오염물을 제거해준다고 하네요. 이후 물을 빼내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 몸을 건조해주는 식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15분 안에 끝나죠.

 

이후로도 다양한 형태의 장치가 개발돼왔습니다. 세차장처럼 솔이 가로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움직이는 제품도 있죠. 솔에 몸을 대고 있으면 솔이 움직여가며 자동으로 씻겨 줍니다. 솔이 움직이는 방향이 한정돼 있다 보니, 사람이 움직이는 솔에 몸을 갖다 대가며 씻어야 한다는 점이 단점이긴 하네요.

 

이런 장치들을 보고 있자면 “굳이 이렇게까지 씻어야 하나?”란 생각이 듭니다. 위에서 소개해드린 세차장 형태의 제품은 알리바바에서 746달러(약 91만 원)에 판매하고 있어요. 귀찮음을 위해 지불하기엔 조금 비싼 가격이죠. 하지만 인간 세탁기가 빛을 발하는 상황은 따로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혼자 씻기 어려운 노인이나 장애인 등이 사용할 때죠. 휠체어를 탄 상태로 장치 안에 들어가면 가느다란 물줄기가 뿜어 나와 몸 곳곳을 씻겨주는 방식의 목욕장치도 개발돼 있습니다(QR코드 링크 참조). 영상 속 편안한 표정으로 목욕을 즐기는 할머니의 표정을 보니, 귀찮음 때문이든 노약자를 위해서든 기술은 인간의 행복을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 : 김소연 기자 기자 lecia@donga.com
디자인 : 이한철
과학동아 2022년 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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