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Tech] 산(酸), ‘풍요의 시대’ 연 식품계의 일등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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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가 나오는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다. 냉장고를 열어 눈에 띈 재료 몇 가지로 뚝딱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면 신기하다못해 신성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런데 유명인의 냉장고에서 꺼낸 식재료를 가만히 보다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기 등 기본적인 농축산물을 제외하면 버터, 간장, 소스, 밀가루, 어묵 등 거의 대부분의 식재료가 공산품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식품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마트’와 ‘시장’으로 대표되는 소매점을 거쳐 가정에 왔다. 공산품이 즐비하게 늘어선 소매점은, 식품이 싸고 풍요로워진 오늘날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가 자신의 유명한 사진 작품에 마트의 식품 진열장을 곧잘 등장시키는 것도, 거대한 매장에 줄 맞춰 늘어선 식품의 풍요로움이 신비로움과 아이러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기 때문이리라.
당신의 냉장고를 책임지는 식품화학

이런 풍요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식품의 대량생산이 있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20세기에 크게 발달한 식품화학이 있다. 식품화학은 식품을 화학의 눈으로 다시 보는 학문이다.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지방 같은 기본적인 영양 성분부터, 펙틴과 같이 몸에 이로운 역할을 하는 물질(이를 생리활성물질이라고 한다)의 화학적 특성을 다룬다. 대학의 식품공학과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기초 과목 중 하나로, 이후에는 이런 화학적 성질을 응용해 식품을 가공하는 방법으로 넘어간다.

식품에 화학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소비자에게는 낯설다. 화학이 ‘먹을 것과 관계가 먼 물질을 다루는 실험실 과학’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또는 석유화학으로 대표되는 화학공학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화학은 식품과 요리의 기본 원리다. 발효가 일어난 김치, 그윽한 빛을 내는 진한 간장, 새콤하고 걸쭉한 요구르트 소스를 얹은 샐러드 등 많은 식품은 화학 반응(주로 미생물에 의한 분해 반응)에 의해 그 맛과 향, 형태가 완성된다. 심지어 우리 몸이 음식물을 소화하고 에너지와 영양분을 얻는 과정 자체도 화학 반응이다. 효소가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하는 과정, 단백질을 위 안에서 산과 효소의 작용으로 잘게 부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20세기의 식품공학자들은 이런 분해 반응을 식품 산업에 응용할 방법을 연구했다. 대표적으로 흔히 ‘발효’라고 부르는 식품 가공 공정이 있다. 식품 미생물이 식재료 속 단백질이나 탄수화물을 효소로 분해해 잘게 자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 등 아미노산이 많아져 식품의 풍미가 늘어나고,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영양 성분도 풍부해진다. 한국이 자랑하는 김치나 각종 젓갈류, 장류, 요구르트, 빵 등 식품 상당수가 발효 과정의 결과물이다.
 

식품공학자들은 이런 식품을 인공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미생물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통적인 식품 가공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공장에서 쓰기엔 시간이 많이 든다. 식품공학자들은 차선책으로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또다른 분해 반응에 주목했다. 바로 산을 이용한 분해다. 위에서 염산을 만난 단백질은 효과적으로 아미노산으로 분해가 되는데, 십이지장에서 다시 염기성을 띠는 탄산수소나트륨을 만나 중화 된다(이 과정이 간혹 잘못되면 위산이 많이 분비돼 속이 쓰리거나 손상되는 증세를 겪는다).

산으로 단백질을 분해하는 과정은 가수분해다. 원래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펩티드 결합이라고 하는 화학 결합을 통해 긴 사슬 모양으로 연결된 중합체다. 펩티드 결합을 하면 아미노산의 카복실기와 또다른 아미노산의 아미노기가 만나 결합하고, 물이 빠져 나온다. 그런데 산이 있으면 이 반응이 거꾸로 진행된다. 즉 물이 수소 이온과 수산화 이온으로 쪼개져 단백질 사이에 끼어 들어가고, 결합은 끊어진다. 단백질은 다시 원래대로 아미노산 조각으로 분리된다.




산분해 식품, 건강 문제는 없을까

산을 이용하면서, 식품 생산 효율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미생물을 이용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리고 까다롭던 분해 과정이, 산을 이용하면서 훨씬 빠르고 간편해졌다. 예를 들어 간장의 경우 효소(가수분해 효소)를 이용하면 제조에 반 년이 걸리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메주에 미생물(곰팡이 등)을 키워 만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반면 묽은 식용 염산을 이용하면 며칠이면 제조가 가능하다. 대량생산의 길이 열린 것이다. 게다가 분해 효율이 좋아 거의 완전한 단백질 분해가 가능해 간장의 향과 맛도 좋은 편이다(우리 몸이 맛이나 향을 느끼려면 잘게 분해된 상태의 아미노산이 필요하다. 단백질 덩어리의 맛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식품의 제조, 가공과 이용 등에 대한 규정을 담은 ‘식품공전’에 따르면 이렇게 산으로 식물성 식재료를 가수분해한 제품을 ‘식물성 단백가수분해물(HVP)’이라고 한다. 콩 단백질을 분해하는 간장이 대표적인 예고(‘산분해 간장’이라고 부른다. 전통방식으로 메주를 띄워 만든 한식간장 등 다른 간장도 물론 존재한다), 그 외에도 옥수수나 밀 등의 식물성 단백질을 분해할 때 쓴다.

산은 분해 외에 다른 공정에도 요긴하다. 유제품이나 잼, 주스, 장류, 통조림류, 한천 등을 세척하거나 가공할 때도 쓰이고, 기름을 정제할 때도 쓰인다. 과실의 껍질을 제거할 때에도 쓰인다. 보통 1~2% 농도의 염산에 담갔다가 물로 씻고, 다시 염기성 용액에 담근다. 녹용 등 동물성 한약 재료를 몸에 흡수되기 좋게 분해하기 위해 산을 쓰는 연구도 있었다.

하지만 산을 식품에 이용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는 소비자도 많다. 가장 큰 우려는 건강에 대한 우려다. 혹시 문제는 없을까. 일단 식품 공정에 산을 이용하는 것 자체는 안전하다. 묽은 산을 이용하는데다 엄격한 공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김왕준 동국대 식품생명공학과 교수는 “허가가 났다는 것은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라며 “다양한 미생물이 향미물질이나 생리활성물질을 만드는 전통 발효 간장에 비해 품질 차이는 날지 몰라도 식품으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중반, 산을 이용한 분해 공정 과정에서 건강에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부산물이 생긴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잠시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이른바 ‘간장파동’). 문제의 물질은 3-모노클로로프로판-1,2-디올(3-MCPD)로, 지방산이 고온의 환경에서 식품으로 가공되는 과정에서 생긴다. 하지만 2010년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현 식품의약품안전처)이 낸 자료(3-MCPD 리스크 프로필)에 따르면 빵이나 시리얼 등 가열한 곡식이나 도넛 등의 과자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이 물질이 식품 산분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한 식품업계 연구원은 “소금이 든 가열식품에서 주로 발견되는 등 산보다는 염화이온(Cl-)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 물질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는 것은 혹시 모를 건강 위해성 때문이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이 물질을 2B 그룹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2B는 아직 발암물질로 보긴 어렵지만 연구 자료가 부족하므로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국내에서도 예방 차원에서 식품공전으로 검출 한계를 정해 놓고 있다. 현재 산을 이용해 분해한 간장이나 이를 일부 포함한 ‘혼합간장’의 경우, 3-MCPD가 0.3mg/kg 이하, 기타 HVP의 경우 1.0mg/kg 이하로만 검출돼야 한다. 이 기준은 유럽이나 호주, 말레이시아 등(0.02mg/kg)보다는 느슨하지만 미국 FDA(1.0mg/kg)와는 같거나 높은 기준이다.
 

“하나의 유령이 식탁을 배회하고 있다.
산(酸)이라는 유령이”


현재까지의 조사, 연구 결과를 보면, 잘 관리되고 통제된 상황에서 산을 이용해 대량 생산된 식품을 섭취했을 때 문제를 겪을 가능성은 낮다. 2010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식품 섭취에 의한 3-MCPD 인체 유해성은 낮은 편에 속한다. 검출량도 적다. 2007년 이후 식품의약품안전청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간장과 라면 스프 등 식품을 대상으로 3-MCPD 검출 시험을 했는데, 평균값이 기준을 넘어 검출된 경우는 없었다.

산분해 공정은 식품의 대량 가공과 유통을 가능하게 한 공신 중 하나다. 하지만 비싸더라도 안전하고 고급스러운 식재료를 찾는 소비자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먹을 것, 즉 식품에 대해 관대할 수 없는 게 사람의 심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다행히 관련 정보가 많이 공개돼 있고, 미흡하나마 기준도 세워져 있다. 남은 것은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이다. 값싸고 대량생산에 유리하며 좋은 맛을 내는 산분해간장과, 미생물을 이용해 오래 푹 우려낸 한식 간장, 효소를 이용한 효소분해간장, 또는 이들과 산분해간장을 섞은 혼합간장은 각기 다른 매력과 장점이 있다. 정보는 공개돼 있고, 과학은 현재로서는 과도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내린 상태다. 결정은 소비자의 몫이다.

글 : 윤신영 기자 ashilla@donga.com
과학동아 2015년 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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