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분 할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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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란 게 뭔가? 현실을 어떻게 정의할 텐가? 당신이 보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는 데서 오는 전기신호를 뇌가 해석한 것, 그게 바로 현실이다.” -영화 ‘매트릭스(1999)’ 中 모피어스(로런스 피시번)의 대사

우리 뇌에는 촉각을 느끼는 ‘감각영역’이 있다. 꼬집으면 신경을 타고 전기화학적 신호가 이곳으 로 전달돼 뇌가 촉각을 느 낀다. 이 감각영역을 직접 자 극하면 어떨까. 그래도 사람은 똑같이 손에서 촉각을 느낄까. SF에 나올 것 같은 이런 실험 을 직접 해 본 연구팀이 있다. 정 용안 가톨릭대 통합의학연구소 교수팀이다. 정 교수팀은 25만Hz 수준의 약한 초음파를 지원자 15 명의 뇌에 쏴 손에서 감각을 느끼 도록 했다고 ‘사이언티픽 리포트’ 3월 4일자에 발표했다. 지원자들은 손에서 찌릿하고 가 려운 촉각뿐 아니라 차가움(온도지각), 무거운 물체 를 드는 느낌(운동지각) 등 9가지 감각을 느꼈다. 정작 손에는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1파트에서 소개한 가상현실 기기가 아무리 발달해 도 사람의 오감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는 없다. 하지 만 뇌를 직접 자극하는 기술은 다르다. 팔과 다리에서 신경을 타고 척수로 들어간 감각신호는 시상하부 에 있는 후측배내측핵을 거쳐, 대뇌 피질의 좌․우측 섬엽에 도착한다. 만약 가상 신호가 이 경로 어딘가에 서 끼어들어간다면? 또는 아예 처음부터 대뇌 피질 에 직접 주어진다면? 뇌는 실제 신호와 합성 신호를 분간할 방법이 없다.


2030년, 나노봇이 가상현실 이끈다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올 까. 온다면 언제쯤 올까.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 구글 엔지니어링 이사는 2030년쯤 그 순간이 올 것이 라고 예측한다. 커즈와일은 2006년 ‘특이점이 온다’ 라는 책에서 가상현실의 미래를 예언했다. 2020년대 말이면 나노봇이 뇌를 직접 자극해 오감을 느낄 수 있 게 되고, 2030년대엔 가상과 현실 사이에 경계가 사 라질 것이란 전망이었다. 나노봇 수십억 개가 뇌 모세 혈관에 상주하면서, 우리가 가상현실을 경험하고 싶 을 때마다 실제 감각 기관에서 오는 신호를 차단하고 가짜 신호를 뉴런에 전달한다. 거꾸로 뇌에서 근육과 사지를 움직이려 할 때도, 나노봇들이 신호를 중간에 가로채서 실제 몸 대신 가상현실의 육체가 움직이게 한다.


이런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최홍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로봇공학전공 교수는 “혈구 보다 작은 로봇이 스스로 전기나 초음파 등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최 교수 는 지난 2013년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마이크로 크기 의 로봇을 개발했다. 크기만 놓고 보면 일찌감치 가능 성이 확인된 셈이다. 다만 크기를 줄이는 과정에서 자 체 동력장치를 빼 로봇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인체외부에서 자기장을 걸어 로봇을 움직이는데, 이 방법으론 으론 뇌혈관 안에서 움직임을 미세하게 조절하기 힘들다.

박종오 전남대 교수가 이끄는 박테리오봇 융합연구단은 마이크로 로봇에 박테리아를 붙여 동력 문제를 극복했다. 박테리아가 특정 물질(혈관형성촉진인자 등)을 쫓아 특정 위치(암세포 등)까지 로봇을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역시 뇌의 정확한 부위로 로봇을 조종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상윤 부경대 공간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목표 뉴런에 정확히 도달하기 위해선 결국 자체구동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유체가압추진방식’ 마이크로 로봇을 개발해 2011년 특허를 출원했다. 그의 로봇은 문어처럼 유체를 뒤로 내뿜어 앞으로 나아간다. 자체 구동장치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크기가 작다.
이 교수는 “최근 비공개로 특허 출원된 기술 중 마이크로 로봇을 이용한 가상현실체험 관련 특허가 여럿 있다”고 말한다. “모두 실험실 수준의 연구들입니다. 보통 상용화보다 20년쯤 앞서 특허가 나오지요. 레이 커즈와일도 미국에서 출원된 특허를 보고, 여기에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해 ‘나노봇 가상현실’을 예측했을 것입니다.” 이 교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2030년 무렵보다 오히려 더 빠른 시일에 가능할 수 도 있습니다.”


PLUS |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세계
 
철학은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는 데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현실이 감각에 비친 가상에 불과하며, 참된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도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가상이며, 진정한 실체는 원자의 배열이라고 했다. HMD도 없던 옛날 옛적부터 이미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는 디지털 시대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상태, 즉 ‘파타피직스(pataphysics)’라고 말한다. 가상현실 저널리즘(1파트 참조)에서 보았듯, 사람들은 가상과 현실을 봉합선 없이 이어붙이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진 교수는 작년 발표한 책 ‘이미지 인문학’에서 대중은 이미 가상과 현실을 굳이 나누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책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를 인용한다. 플루서는 1991년 발간한 책 ‘디지털 가상’에서 우리에게 사람, 동물, 식물, 기계, 산과 바다로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우리 감각에 나타난 가상일 뿐이며, 그 실체는 미립자의 조합이라고 주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초고해상도 HMD가 발명되면 눈으로 가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한마디로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밀도의 차이, 강도의 차이, 해상도의 차이라는 말이다. 가상과 현실의 고전적 구별을 없애버린 플루서는 묻는다. 현실은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가?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있을까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가상현실 세계가 도래하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커즈와일은 “신경계 내의 가 상현실이 해상도와 신뢰도 면에서 실제 세계와 다를 바 없게 되면 우리의 경험은 점차 가상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실보다 가상에서 더 큰 자유 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에서 우리는 완전 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남자가 여자가 될 수도 있 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육체를 벗어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사람은 자신 의 정체성을 몸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 나는 뚱뚱한 사람이야, 피부가 까매, 키가 작아…. 이런 정체성이 가상현실에선 의미가 없어진다. 커즈와일은 “타인이 되는 경험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사 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다양한 면들을 갖고 있지만 억 누르며 살아간다. 옷이나 화장, 성형, 다이어트로 일 부 바꿔볼 순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가상현실에선 하나의 몸이나 인성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커즈와일 은 “완전몰입형 가상현실을 통해 개인의 다채로운 인 간성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만 있는 걸까. 가상현실에 빠진 우리 몸에 어떤 부정적 변화가 생 기는지 최근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스웨덴 카롤린 스카 연구소의 로렉스 버긴항 박사팀이 2014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우 리가 가상현실을 통해 몸을 벗어났을 때 기억상실증 이 생길 수 있다. 박사팀은 독특한 실험을 설계했다. HMD를 쓴 사람 앞에 연구자 한 명이 앉아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시에 이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HMD 화 면에 띄워준다. 피험자는 마치 제3자가 된 것처럼 연 구자와 자신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 는 들은 이야기를 얼마나 기억했을까.

피험자 129명은 그냥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기 억력이 20% 가까이 떨어졌다. 기능성자기공명영상 (fMRI)을 촬영해보니 해마 뒷부분의 활성도가 떨어 졌다. 해마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다. 연구팀 은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을 때 1인칭 시점에서 바라 본 공간감이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나를 벗 어나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토탈리콜’에서 주인공은 가상현실을 완전히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 자신을 화성식민지 첩보원이 라고 믿는 그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 평범한 일용직 노동자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정체성을 마음 대로 바꾸는 게 꼭 좋은 일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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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가상현실 눈앞으로 다가오다
PART1. 이곳에 시인이 왔어야 했다!
PART2. 현실 닮아가는 가상현실
PART3.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분 할 수 없다면?

글 : 변지민 기자 here@donga.com
과학동아 2015년 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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