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wledge] 7전 8기, 일반상대성이론의 탄생

상대성이론 100년사 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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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발표한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관하여’는 처음에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당시 독일 물리학계의 거장이었던 막스 플랑크가 이 논문을 크게 칭찬하자 비로소 물리학자들은 논문을 쓴 이를 궁금해 했다. 몇몇 물리학자들은 베른 특허국을 찾아가 아인슈타인을 찾았다.

자유주의자 같은 옷차림의 젊은 특허국 심사관은 다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이들을 맞았다. 이 젊은 재야 물리학자는 자신의 논문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모두 답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었다.

특허국에서 2년을 더 일한 뒤인 1907년,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스위스 베른대에 자신의 여러 논문과 이력서를 제출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대학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박사학위논문이 통과된 지 얼마되지 않은 젊은 물리학자였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미 17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1908년 29살의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교수자격학위를 얻었다.
 


드디어 교수가 된 아인슈타인


하루 종일 꼬박 특허국에서 일해야 했던 아인슈타인은 강의를 이상한 시간에 잡았다. 열의 분자운동이론을 다뤘던 첫 강의는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수강자는 단 세 명이었고, 그 중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절친한 수학자 친구 미셸 베소였다.

그해 겨울학기의 두번째 강의는 매주 수요일 저녁 6시에서 7시까지 수강자 네 명 앞에서 진행했다. 그러던 중 스위스 취리히대에서 부교수 채용공고가 났다. 1867년 클라우지우스가 떠난 뒤 없어졌다 부활한 이론물리학부였다. 아인슈타인은 당연히 지원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알프레트 클라이너의 추천사가 흥미롭다.

“아인슈타인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이론물리학자중 한 사람입니다. 상대성원리에서 그의 비상하게 예리한 통찰력과 탐구능력, 명쾌함, 엄밀한 필치를 알 수 있습니다.”

1909년 아인슈타인은 취리히대의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선출됐다. 1911년 체코 프라하의 칼 페르디난트대 정교수로 옮긴 뒤에는 중력에 관한 논문을 여러편 발표했다. 그 중 ‘빛의 진행에 중력이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태양의 중력 때문에 별빛이 휘어져 보일 수 있음을 계산하고, 그 편차를 0.83초(1초는 3600분의 1。)로 예측하기도 했다(아인슈타인은 1915년 이 값의 두 배인 1.6초가 올바르다고 수정했다).

1912년 가을 아인슈타인은 모교 취리히 연방공대(ETH)의 정교수가 됐다.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부터였다. 대학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던 마르셀 그로스만과 함께 특수상대성이론을 일반화한 이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1913년 아인슈타인과 그로스만의 공동논문 ‘일반화된 상대성이론 및 중력 이론의 개요’가 출판됐다. 기존 상대성이론을 일반화할 필요성과 방법을 다뤘고, 중력이론과의 관계를 보여줬다. 매우 중요한 연구결과였다. 하지만 논문에서 제시된 중력장 방정식은 ‘어떤 좌표변환에 대해서도 똑같은 모습을 띠어야한다’는 성질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그로스만의 새로운 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보다는 더 일반적이었지만, 아직은 일반상대성이론이라 부를 수 없었다. 1913년 8월 아인슈타인이 로렌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타협에 대해 얼마나 불만족스러워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이론에 대한 제 믿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 우리가 얻은 중력장 방정식은 일반좌표변환에 대한 공변성(변환에도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성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선형변환에 대한 공변성만 확인됐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론의 전체적인 믿음은 바로 좌표계의 가속이 중력장과 동등하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론의 방정식들에서 선형변환 외의 다른 변환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이 이론은 바로 그 출발점과 모순을 일으키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중에 떠버린 셈입니다.”





오류투성이였던 1914년 논문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강의나 논문지도와 같은 귀찮은 업무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자리를 갈망하고 있었다. 1913년 봄 막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에게 독일 베를린대 정교수직과, 새로 건립된 물리-기술 제국연구소(PTR) 소장 자리를 제안했다. 강의나 잡무에 시달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아인슈타인으로서는 이를 사양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드디어 1914년 3월 말 베를린에 도착한 아인슈타인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생활을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개인적인 환경은 점점 좋아졌지만,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모처럼 찾아온 자유로운 학문의 기회는 1914년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얽히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에 기존보다 진일보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여전히 오류투성이였다. 다행히 아인슈타인의 접근이 틀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시로선 아무도 없었고, 그 오류를 처음 알아낸 사람도 아인슈타인 본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함께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를 잡았던 취리히 연방공대.]

아인슈타인이 오류를 극복하고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얻게 된 데는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의 공로가 크다. 1915년 6월 28일 힐베르트가 아인슈타인을 독일 괴팅겐대로 초빙해 한 주 동안 세미나를 하게 했다. 세미나는 아인슈타인에게 큰 자극이 됐다(Plus 참조).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상대성이론과 중력이론을 만드는 데 골몰했다. 그리고 7월에서 10월 사이에는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수정했다. 그동안의 이론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깨달은 것이다.

1915년 11월 4일 아인슈타인은 그로스만과의 공동연구에서 얻었던 이전의 중력장 방정식을 과감히 버렸다. 연구는 순조로웠다. 2주 뒤인 11월 18일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중력 이론의 두 가지 관측결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수성의 근일점 운동(태양 외 다른 천체의 영향으로 근일점이 미세하게 변하는 현상)이 100년 동안 43초임을 유도했고, 중력장에서 빛의 휘어짐을 이전에 자신이 계산했던 것(0.83초)의 2배(1.6초)라고 고친 것이 이 때였다. 11월 25일,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프로이센 과학 학술원 물리학-수학 분과에 ‘중력장 방정식’이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1916년 3월 20일에는 ‘물리학 연보’에 논문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를 제출했다.

역사적인 이론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최종결과에 적이 만족했다. 여기서 계산한 수성의 근일점 이동은 이미 오래 전에 정밀하게 관측된 값과 잘 맞아 떨어졌고, 이론 역시 논리에 빈틈이 없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고안하게 된 동기 중 하나였던 ‘물리 법칙은 모든 좌표계에서 동등하다’는 원리도 충족시켰고, 중력이 약한 경우에는 고전적으로 잘 확립된 뉴턴의 중력이론도 도출할 수 있었다. 명실공히 새로운 그리고 올바른 중력이론을 얻은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새로운 중력장방정식을 풀어서 시간과 공간의 근본적인 모습을 밝혀내고 이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글 : 김재영
에디터 : 변지민 기자
과학동아 2015년 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