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과 화학의 경계에서 색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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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 풀어 헤쳐졌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무지개는 예술가와 철학자의 로망이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영국이 낳은 천재 과학자 뉴턴에 의해 산산조각났다. 뉴턴은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간단한 실험도구인 삼각 분광기를 이용해 ‘쪼개’는 단순한 방법으로 무지개를 한갓 빛의 장난으로 만들었다. 뉴턴의 업적은 단순히 빛을 쪼개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프리즘을 통해 보였던 ‘빨주노초파남보’의 색 배합에서 자주색을 이용해 빨강과 보라색을 연결했다. 첫 번째 색상환이 탄생한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 색 이론가들은 이 색상환을 극한까지 발전시켰다. 프랑스의 화학자인 미셸 외젠 슈브뢸이 1864년에 발표한 색상환은 그 시대의 컬러 인쇄 기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검정과 흰색, 빨강, 노랑, 파랑의 기본 색으로 화가들은 다양한 색을 만들었다. 특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 발견된 각종 화학원소는 그동안 어설픈 연금술과 자연물에 의지하던 안료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안료의 역사는 기원전 1만 5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검은색과 붉은색, 흰색과 노란색 안료로 그려졌다. 목탄이나 붉은 흙, 석회나 뼈같은 천연 재료를 이용해 만든 안료다.








WHITE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안료

석회석이나 뼛가루를 이용해 흰 안료를 얻던 인류는 ‘백랍’을 새로운 안료 후보로 사용했다. 석회석이나 뼛가루는 가루는 하얗지만 안료로 만들었을 때 불투명한 흰색을 띄지 않았다. 대체로 찾은 것이 ‘백랍’이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 벽화에서는 백랍을 원료로 칠한 그림이 발견된다. 백랍은 식초가 납과 반응할 때 만들어지는 초산납염이라는 중간 생성물에서 나온다. 포도를 재배했던 고대 이집트에서 식초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항아리에 식초와 납을 넣고, 동물 똥과 함께 헛간에서 한달 정도 발효시키면 산이 납을 부식시켜 탄산납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탄산납을 곱게 갈아 기름이나 물과 같은 전색제와 섞으면 흰색 안료가 된다.

1780년 프랑스의 기통 드 모르브가 흰색 산화아연을 찾아내기 전까지 백랍은 전무후무한 흰색 안료였다. 심지어 백랍을 가열하면 노랗거나 빨간 안료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용도가 다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백랍 제조공들이 급성 위염과 위경련, 변비나 어지럼증, 시력상실, 마비 증상같은 납 중독 증세를 보임에 따라 안전한 대체제를 찾아야 했다.

산화아연이 처음부터 흰색 안료로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격이 비쌌고, 너무 느리게 말랐다. 산화아연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 말에 산화아연을 흰색 안료로 만들 수 있는 건조제를 찾아낸 뒤였다. 1876년에는 백랍 안료와 같은 가격으로 판매될 정도로 생산량이 늘어났다. 아연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덕을 본 것은 흰색만이 아니었다. 1817년 독일의 프리히 슈트로마이어는 아연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분석해 새로운 금속 ‘카드뮴’을 밝혀냈다.






YELLOW  금에 밀린 비운의 색

슈트로마이어가 카드뮴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노란색 산화물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카드뮴 황화물은 선명한 노란색을 띄었고, 합성 조건을 바꾸면 주황색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드뮴은 다른 노란색 안료에 비해 매우 비싸 생산이 중단됐다.

전통적으로 노랑은 구하기는 쉽지만 잘 사용하지 않는 안료였다. 배신과 겁쟁이의 색상이어서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노랑은 ‘황금’에 밀리는 색이었다. 금은 돈만 있다면 채취하거나 합성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만능 재료였다. 다만 연성이 큰 금을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 안료 제작자들은 수은과 섞었다가 수은만 증발시키는 등 금을 딱딱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했다.

14세기 화가들은 ‘아름다운 노란색은 어떤 색보다 금보다 닮았다’는 말을 하며 노란색을 사용했다. ‘지알로리노’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데 현재 정확한 제조법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에 미루어 현재 남아있는 물감의 성분을 분석해 제조 과정을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합성 노란 안료는 주석과 납의 합금인 안티몬산납과 백랍을 약하게가열해서 만들어지는 산화납으로 만든다. 특히 안티몬산납으로 만든 안료인 레드틴 옐로는 300년 가까이 사용되며 17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합성 노란 안료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물에서 얻은 염료로 만든 안료다. 물푸레나무과 식물인 목서초(Reseda luteola )는 20세기까지도 노란색 염료를 만들기 위해 재배됐다. 붓꽃의 일종인 크로커스와 사프란도 노란 안료의 재료다. 특히 사프란은 계란 흰자위와 섞으면 매우 순수한 노란색이 돼,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문제는 비용. 비싼 목서초 추출 안료보다 상대적으로 싼 레드틴 옐로가 더 많이 사용됐다.









RED  최고의 붉은 안료, 버밀리온

빨강은 자연에서 매우 찾아보기 쉽다. 철이 산화되면 붉은 색을 띄어, 철 함유량이 높은 흙에서도 쉽게 보인다. 꼭두서니 나무 뿌리나 연지벌레등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도 붉은 안료 원료로 이용됐다.

백랍에 높은 열을 가해도 적랍으로 변해 붉은 안료로 만들 수있었다. 하지만 20세기까지 최고로 꼽히던 것은 ‘진사’라는 광물로 만든 붉은 안료다. 진사는 황화수은으로 이루어진 광물인데, 여기서 추출한 붉은 안료를 버밀리온이라고 부르는데 다홍색을 띈다.

진사는 기원전 3000년 중국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8~9세기 사이에 저술된 ‘색채의 구성’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버밀리온을 만든 방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11세기까지 버밀리온은 금으로 장식하는 것만큼이나 비용이 들었고, 15세기가 지나 건식 합성과정이 나오면서 마음껏 쓸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내려갔다.

버밀리온의 가격이 비쌌던 것은 제조 과정에서 잘못되면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실제 자연 광물 상태에서도 흑진사가 존재한다. 1687년 독일의 고트프리트 슐츠는 흑진사를 암모니아나 칼륨 용액에 넣고 가열하면 붉은색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습식 합성과정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버밀리온은 대부분 습식으로 만들어진다.









BLUE  보석에서 나오는 최고급 안료

고대부터 파랑은 부의 상징이었다. 짙은 청색을 만들기 위해 색 제조자들은 온갖 재료를 찾았다. 청색 안료를 만들기 힘들었던 이유는 푸른 색의 천연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파란 꽃이나 푸른 털을 가진 동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푸른색은 주로 산란으로 나타난다. 공작의 깃털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미세한 홈이 있는데, 이 홈에 푸른 파장의 빛이 산란되면서 깃털 전체가 푸르게 보인다.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푸른색 안료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남동석으로 만든 안료 아주라이트였다. 아주라이트는 엄밀히 말해 청색이 아니라 녹색을 띈 하늘색이다. 그러나 화가들이 원한 청색은 밤하늘을 떠올리는 짙은 파랑이었다. 이를 위해 찾아낸 것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간혹 건너오던 보석인 청금석이었다.

청금석은 라피스라줄리라고도 부르는 준보석이다. 채도가 높으면서도 깊은 청색을 띈다. 이 색에 매료된 색 제작자들은 청금석으로 안료를 만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보통 색깔을 가진 재료를 고운 가루로 만든 뒤 안료로 만드는데, 청금석은 곱게 갈수록 그 빛을 잃기 때문이다.

청금석으로 울트라마린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기록상으로 13세기가 넘어서야 울트라마린이 사용되었고, 청금석이 유럽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 14세기인 점에 미루어 13세기 말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청금석 자체 가격도 비쌌지만 울트라마린으로 만드는 공정도 복잡했다. 송진과 왁스를 정확한 비율로 넣어 녹인 뒤 천에 감싸 액체를 제거하고, 뜨거운 잿물에 담가 짓이기면 잿물이 청색으로 물든다. 이 잿물을 말려 가루를 만들면 울트라마린을 만들 수 있다. 20세기까지 오는 동안 색 제조가들이 아름다운 색을 찾기 위해 가졌던 노력은 끝도 없다. 화려한 색깔과 화가의 정성이 합쳐진 예술품을 우리는 그저 즐겁게 감상하며 경탄하는 것일 뿐. 빨강과 노랑, 파랑의 세 가지 색에서 화가들은 온갖 색을 창조했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에서 과연 우리는 몇 가지나 되는 색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글은 필립 볼이 쓴 ‘브라이트 어스(살림)’를 참고했습니다.





 

글 : 글 오가희 기자
과학동아 2013년 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