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도 지우는 숨기의 달인

애벌레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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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재감을 없애거나 위협한다]

약한 놈이 강한 놈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지만, 딱딱한 껍데기는커녕 날카로운 이빨도, 공격하기 좋은 집게발도, 도망갈 날개조차 없는 애벌레는 지나치게 약하다. 게다가 질 좋은 단백질이 풍부해 먹잇감으로 인기가 많다. 곤충과 새, 파충류, 포유류 등 호시탐탐 노리는 수많은 적의 눈을 피해 애벌레들은 어떤 전략을 선택했을까.



거의 모든 거미류가 육식을 하고 곤충의 반 이상이 육식을 한다. 조류와 파충류, 어류, 양서류, 포유류 등 척추동물의 대부분이 육식을 한다.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일은 가장 널리 퍼진 생활양식이다. 동물은 기관이나 근육 형성, 발육과 번식에 필요한 단백질을 스스로 만들수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모든 단백질을 식물에서 얻을 수는 없을까. 식물을 먹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동물은 셀룰로오스나 리그닌처럼 식물의 딱딱한 성분을 분해해 필요한 영양소를 얻는 생리적 메커니즘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식물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독성 화합물(알칼로이드, 탄닌 등)을 해독할 수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포식자(동물)와는 달리 애벌레는 뽕잎이나 참나무 잎 같은 식물을 먹는다. 고기를 먹지 않고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단백질을 잎에서 얻는다. 애벌레는 식물 섬유소를 분해하는 효소(셀룰라아제)를 분비하거나 자기 몸속에서 살아가는 균의 도움을 받아(공생균) 섬유소를 소화시킨다. 다른 동물들이 소화하지 못하는 섬유소를 단백질로 바꾸고 독성이 있는 잎을 해독할 수 있다. 생태계에서 유일하게 애벌레를 비롯한 초식동물만이 이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이 특별한 능력 탓에 애벌레와 초식동물은 다른 동물들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특히 애벌레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부드러워 최고의 먹잇감이다. 애벌레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일! 수천만 년 동안 애벌레들은 살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거쳐 진화해 왔다. 애벌레만의 뛰어난 생존 전략이다.


 

[꽃술재주나방 애벌레를 툭 건드리자 기계체조 선수처럼 몸을 뒤로 뒤틀어 불룩하게 만들었다. 또 몸 앞부분을 들어 올려 뱀 같은 자세를 취한다. 몸을 훨씬 크게 보이게 하고 공격할 것처럼 행동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화려한 붉은색으로 적을 위협한다.]



완벽히 숨으려면 나뭇가지 돼라

포식자들은 몸집도 크고 힘이 센데다 감각기관까지 예민해 쉽게 애벌레의 존재를 탐지할 수 있다. 공격 무기는커녕 방패마저 없는 가냘픈 애벌레는 살아남기 위해 천적의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낮에는 먹이(식물)에서 내려와 땅에 숨고, 포식자들이 나타나지 않는 밤에만 식사를 한다. 하지만 애벌레가 커가면서 먹성도 좋아진다. 더 많은 꽃과 식물을 찾거나 번데기를 만들 은신처를 찾으려면 낮에도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낮에 움직이면 노출되기도 쉽고 이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많이 쓰지만 위장술이나 보호색으로 자신을 보호하도록 진화해 왔다.

[큰담흑물결자나방의 애벌레는 머리가 검고 몸 전체에 노란색과 검은색 무늬가 섞여 있다. 이 호랑무늬가 경계색이다.]



애벌레들은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고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도록 몸 색깔이나 무늬, 형태를 주변과 비슷하게 바꾼다. 식물의 갈라진 틈과 나무줄기, 가지를 이용하거나 잎 꼭지, 잔가지, 나무껍질, 싹, 꽃, 열매, 덩굴 등 주위 환경에 몸을 일치시킨다. 타고난 위장술의 달인, 변신의 귀재인 셈이다.



애벌레들은 주변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한다(의태).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자나방과(Geometridae)의 애벌레다. 자벌레는 우선 앞다리(가슴다리)로 움직여 나뭇가지를 꽉 움켜잡은 뒤 뒷다리를 끌고 가 앞다리에 붙인다. 사람들은 이 애벌레가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자로 길이를 재는 것처럼 생각해 이름을 자벌레라 지었다. 또 뒷다리를 앞다리까지 끌어당기려면 몸을 둥글게 말아야 하는데 마치 고리처럼 둥글게 말므로 영명으로는 고리(Looper)라고도 한다. 모두 애벌레의 행동학적 특성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먹그림가지나방(Menophra senilis)의 애벌레는 나뭇가지처럼 보이기위해 나무줄기 위에서 잔가지가 뻗어나간 듯이 바깥쪽을 향해 붙어 있다. 다른 종류의 나비목 애벌레들이 이동하기 위해 5쌍의 다리(헛발, 배다리)를 갖고 있지만 이 애벌레는 몸을 고정하기 위한 2쌍뿐이다. 원통형의 길고 날씬한 몸매 때문에 더욱 나뭇가지처럼 보인다. 그래서 가지나방 애벌레들을 막대벌레(stickcaterpillars)라고도 부른다. 필자도 애벌레를 채집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가 숨어 있던 가지나방 애벌레를 만지고 감짝 놀란 적이 많다. 산속에서 나뭇가지라고 생각해 손으로 잡았을 때 ‘물컹’하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조팝나무가 먹이식물이다. 종령 애벌레의 몸길이는 40mm 내외. 나뭇가지처럼 서있을 때는 언제나 세 번째 가슴다리를 세워 잎눈처럼 보이게 한다. 여덟 번째 마디등에 돌기가 한 개 있다. 주변 환경에 맞춰 위로 혹은 아래로 나뭇가지 모양을 만든다.]
 

[애벌레가 계절에 맞춰 그들이 먹고 사는 식물과 동화되어 몸에 무늬를 만들어 가는 과정. 새싹 모양과 색의 봄형(1),짙은 녹색인 여름형(2), 나무껍질색의 월동형(3).]



여름에는 나뭇잎, 가을에는 나무껍질

애벌레들은 주변 환경과 몸의 색깔을 같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왕세줄나비(Neptis alwina)는 몸에 그려진 선과 색깔을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인 복숭아나무와 비슷하게 만든다. 새순이 나오는 이른 봄에는 줄무늬 잎처럼 연한 색을, 잎이 푸르러지는 한여름에는 짙은 녹색을 띤다. 가을이 오면서 월동을 준비 할 때는 언제 녹색을 띠었냐는 듯이 나무껍질과 닮은 밤색이 된다. 이처럼 몸 색깔이 변하는 이유는 식물이 분비하는 화학 물질에 대한 생리적 반응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왕세줄나비 애벌레가 살고 있는 복숭아나무에는 ‘알데히드’라는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알데히드의 양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데 봄에서 여름이 될 때 증가한다. 이른 봄에는 애벌레가 적은 양의 알데히드를 섭취해 새 순의 잎처럼 연한 녹색을 띠지만, 여름에 비교적 많은 양의 알데히드를 섭취하면 짙은 녹색을 띠는 셈이다.



먹는 식물의 색에 영향을 받아 몸색깔을 바꾸는 애벌레도 있다. 먹그림나비(Dichorragia nesimachus) 애벌레는 일생의 대부분을 녹색을 띈다. 신기한 점은 식사 시간 동안 먹이인 나뭇잎이 시들어 버리면 애벌레색도 갈색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보호색을 사용하는 달인으로 흔히 카멜레온이 꼽힌다. 그런데 카멜레온과 애벌레가 보호색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카멜레온은 몸에서 색을 띠는 세포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수시로 색깔을 바꾼다(생리적 체색 변화). 그래서 색소를 새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짧은 시간에 색소 위치를 옮겨 몸 색깔을 바꾼다.



애벌레들은 몸 색깔을 바꾸려면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린다. 주변 환경에 맞는 새로운 색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형태적 체색 변화). 즉 애벌레들의 체색 변화는 포식자가 근처에 있든지 없든지 항상 작동한다.



바위에 붙으면 바위 색으로 변하고 나뭇잎에 붙으면 나뭇잎 색이 된다. 넓은 장소뿐 아니라 나뭇가지, 풀포기처럼 작은 환경에서도 마찬가지다. 꼭 들러붙어 주변 환경과 더욱 비슷하게 스며들 듯이 살아야 한다.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풀과 나무가 푸르러지므로 애벌레도 푸르러진다. 나뭇가지나 잎으로 완벽하게 숨어 살기 위해서다.





[먹이 식물의 색에 영향을 받는 체색의 변신. 녹색의 조릿대에 붙은 녹색형과 시들어버린 잎과 같이 변신한 갈색형 애벌레.]





[버드나무를 먹는 종령 애벌레의 몸길이는 50mm내외. 천적을 위협하기 위하여 서있는 머리 부분이 마치 개미 같다. 전체적으로 갈색이고 배의 첫 번째, 두 번째 마디 옆선을 따라 있는 원형의 검은 무늬가 특징이다.]





[버드나무, 은사시나무 등 여러 종류의 식물을 먹이로 한다. 종령 애벌레 몸 길이는 35mm 내외. 전체적으로 녹색이나 등 쪽으로 삼각형 모양의 갈색 무늬가 선명하다. 4쌍의 배다리와 다른 나비목 애벌레에서는 볼 수 없는 몸 끝 쪽의 돌기가 특징이다.]



그림자까지 지우는 ‘투명애벌레’

이보다 더 놀라운 전략이 있다. 몇몇 애벌레들은 그림자를 지워 자신을 숨기기도 한다. 윗면은 어두운 색, 아랫면은 밝은 색을 띠는 것이다. 햇빛에 몸체가 드러나는 것을 어두운 색으로 가리고 그늘진 아랫부분을 밝게 보일 수 있다(대칭색). 대칭색을 이용하면 멀리서 애벌레를 보더라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아 발견하기가 어렵다.



애벌레들은 털을 이용해 그림자를 지우기도 한다. 몸의 옆면을 따라 털을 늘어뜨리면 마치 잔가지나 잎처럼 보인다. 그림자 제거 털이라 부르는데, 애벌레 몸의 윤곽을 달라보이게 하거나 주변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새들은 후각이 아닌 시각으로 먹이를 찾기 때문에 나뭇잎이나 풀에 앉아 있는 애벌레를 한 번에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위장하거나 변신할 수 없으면 호신술을 써야 한다. 특별히 숨는 기술이 없는 녀석들은 포식자에게 발각됐을 때 시야에서 벗어나거나 공격을 좌절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기도 한다. 재주나방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에서는 볼 수 없는 기형적으로 긴 가슴다리 2번째, 3번째 다리 2쌍으로 발길질을 해 위협한다. 한 때 재주나방을 하늘나방이라 칭한 적이 있는데 아마 애벌레가 하늘을 향해 내지르는 발길질을 보고 이름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몸 앞부분을 들어 올려 뱀과 같은 자세를 취하며 물거나 혹은 물 것처럼 행동으로 방어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애벌레 세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위장과 변신술이 판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숨어 있는 자연의 신비가 훨씬 더 오묘하다. 보존 본능의 지혜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글 : 이강운 박사 기자
과학동아 2011년 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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